최근 드라마 연인에 병자호란이 배경이 되면서 병자호란과 남궁민이 연기한 이장현이 실존인물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는 분들은 많은 것 같습니다.
병자호란을 모르는 분들이 없겠지만 오늘은 병자호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 이장현이 실존인물인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병자호란이란?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청나라가 조선에게 벌인 전쟁으로, 인조 14년인 1636년 10월에 후금(後金)의 태종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淸)으로 변경하고 황제로 칭함에 따라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인 광해군과 대북파 대신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홍타이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고, 결국 정묘호란 이후 다시 한번 형제지국의 관계를 맺었던 조선과 청나라는 서로를 적대시하는 관계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배경
1627년에 후금은 조선을 공격하여 정묘호란이라는 침략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였으며, 이후 형제지국의 관계를 맺고 두 나라 간의 전쟁이 일단락된 듯 보였습니다.
그 후, 1628년 이후에는 중강과 회령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이 후금에게 예물 외에 필수품을 공급하는 형태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후금은 당초의 형제 맹약을 어긴 채 식량과 군용선을 요구하며 압박을 가하는 등의 행동을 보였습니다. 특히 압록강을 건너 변경 지역에 침입하여 약탈을 행하면서 변방의 백성과 수장들이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적인 행위로 조선 내에서는 군사적인 반응을 일으키자는 분위기가 강조되었고, 척화배금(화해를 반대하고 후금을 쳐들어가자는 주장)이라는 주장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1636년 2월에는 후금이 조선에게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를 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하고 선전 유창을 선언하여 강경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 4월에는 후금이 나라 이름을 '청'으로 변경하고 황제의 칭호를 받아들이며, 조선에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자를 보내 조선의 동조를 강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왕이었던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후금은 조선에게 강력한 압박을 가하였고 1636년 12월에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과 후금 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전쟁의 비극적인 장면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병자호란 남한산성 전투
병자호란 동안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치열한 피난과 저항을 펼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사건과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조치 및 대비
병자호란 발발 이후 조정은 긴급하게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임명하고, 강화유수인 장신을 주사대장,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임명하여 강화와 서울을 수비하게 했습니다. 또한 세자빈과 원손등을 조선의 종실들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도록 보냈습니다.
인조의 피신
인조와 함께 소현세자 등 많은 신하들이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도로가 막혀있어 남한산성으로 오게 됩니다.
항전의 어려움
남한산성 내부에는 약 1만 3000명의 군사가 있었고 2개월가량의 식량이 있는 상태였지만 왕실 관료를 비롯해 노비등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들어와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또, 의병과 명나라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전투의 과정
전투는 청군의 포위망 형성과 공격으로 시작되었는데, 청군은 남한산성 주변에 포위망을 형성하고 성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조선군은 여러 차례 출성 공격을 시도하며 화살과 돌을 사용하여 청군을 격퇴했습니다.
청군은 포위망을 강화하고 본격적인 포격을 가하면서 조선군을 고립시키려 했습니다. 이에 조선군은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되어 군량이 부족해지면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청군은 1637년 1월에 더 강화된 군세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며, 조선군은 포격전을 펼치며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조선군의 군량 부족과 외부 지원의 어려움으로 결국 조선군은 항복을 결정하게 되었고, 1637년 1월 30일에 조선 국왕이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항복하였습니다.
이렇게 남한산성 전투는 조선군의 고립과 군량 부족으로 인해 결국 청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결과
굴욕의 삼전도
병자호란이 발발한 지 45일 만에 조선의 왕 인조는 항복하게 됩니다. 청나라는 왕에게 굴욕을 주고자 곤룡포를 벗게 하고 2만여 명의 있는 적들 앞에서 황제를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를 하게 됩니다.
인조의 삼전도가 뭔지는 몰라도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임금이 적군 앞에서 땅에 머리를 박고 피를 철철 흘리는 장면은 많이 보았을 텐데, 병자호란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례를 하고 머리를 땅에 부딪칠 때마다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부딪쳐야 했기 때문에 이마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제로는 수십 번 했다고 합니다.
항복 이후
병자호란에서 조선은 청에 항복하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등 척화파 신하들과 20만 명의 백성이 청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로 인해 봉림대군은 8년이란 기간 동안 청에 갇혀 지냈고, 조선의 백성들은 청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됩니다.
기나긴 인질 생활이 끝나고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 세자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됩니다. 어떤 이유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독살이라는 설이 강합니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봉림대군(효종)이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8년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효종은 ㅈ청나라에 대한 적대감이 컸고 지난날에 대한 굴욕을 씻고자 '북벌 계획'을 세우지만,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며 계획을 이루지 못합니다.
마치며
병자호란과 굴욕의 삼전도, 남한산성 전투와 그 결과까지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참고로 연인 드라마의 이장현이라는 인물은 실존인물이 아닌 허구의 인물입니다. 역사적 배경인 병자호란과 인조 등의 인물만 사실입니다.
다음에서 헷갈릴 수 있는 조선왕조 계보에 대해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쉽게 정리해 놓았으니 보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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