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좋아하는 출판사 문학 동네에서 2019년에 나온 최은영 작가님 소설입니다.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 추천합니다.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작가님 사진과 이력이 있습니다.
책에는 총 7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읽어보면 과거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들부터 아쉬웠던 만남들, 이루어지지 않았던 연인까지
쓸쓸한 생각이 많이 들었던 책입니다.
601,602라는 소설에서 맞는 효진이를 보면서 정말 끔찍했습니다.
작가는 이런 소재, 내용들을 어디서 가져오는 것일까요?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들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상 깊었던 글귀가 많아서 밑줄도 많이 그었습니다.
밑줄 긋기
조금의 서운함도 묻어 있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마음을 다쳤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매정할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하고는 그녀가 모두에게 등을 돌려 한국을 떠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사실은 하민의 태도를 납득하는 데 도움을 줬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의 통증을 줄여주지는 않았다.
이 정도로 간편하게 정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대체 왜 우리는 그렇게 수없이 만나고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거지.
p.294
어릴 때 어른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서 이렇게 놀았던 일이 떠올랐다.
학교도 다니기 전 아주 어렸을 때, 그렇게 놀면서 잘 노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기억났다.
엉뚱하고 철딱서니 없는, 말도 안 되는 얘기로 모두를 웃게 하는 막내딸도, 그런 역을 맡으려고 노력했던 내 모습이.
나는 모두를 실망시켰지.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누군가가 내 배를 걷어찬 것처럼 아팠다.
p.268
엄마의 음성 메시지를 들었을 때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딸도, 널 사랑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라는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타들어갈 듯 분노하고 있었는데, 나는 내가 아직도 엄마를 요동치게 하고 돌아버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기뻤다. 타고난 사디스트여서가 아니라, 그저 그런 식으로라도 우리 관계에 아직도 피가 흐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와의 감정적인 교류를 오래도록 바라왔다는 사실은 나조차도 놀랄 일이었다.
p.247
사람들은 내가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철저히 계산적이며,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이상 낯선 사람을 결코 돕지 않는다고. 설사 도와준다 해도 그런 선의의 이면에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다는 오만한 기쁨이 어려 있다고. 그 말은 아마 많은 경우 사실일 것이다. 어쩌면 그도 나를 돕는 행동으로 자기만족을 얻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지의 결과였든지 내가 당시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p.246
고모의 말을 들으면서, 엄마와 함께 거실 한구석에서 접은 다리를 끌어안고 혜인은 누워 있었다. 어른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고 말하면서도 같이 증오할 사람 하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p.222
그때의 엄마는 언제나 혜인에게 미안해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엄마 앞에서 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어떤 나이까지 자식은 부모를 무조건 용서하니까.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도 없이 자연스럽게. 어떤 이유도 없이 무조건 부모를 좋아하는 마음처럼, 아이들의 마음은 어른의 굳은 마음과 달라 자신의 부모를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못한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p.219
"자기가 무슨 특별한 사람이라도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 나이에 벌써 돈 보고 여기 왔으면서. 나는 적어도 안 그랬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나이부터 이런 데 기웃거리진 않았어, 적어도 나는."
"그래요, 선생님, 전 돈이 좋아요. 돈이 좋아서 여기 왔어요."
"내 방에서 나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왔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으면서도 결국 기대하게 된 나를 탓했다.
입소할 때는 한여름이었는데 어느덧 한겨울이 되어 돌아가는 길이온통 얼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시외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내가 떠났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기숙 학원이 더 가깝게 느껴졌고 내가 돌아가야 하는 곳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p.135
어린 나는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더 착한 아이가 되면 훌륭한 아이가 되어 민폐 그 자체인 내 존재에 대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모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부모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를 그저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가짜 이유라도 만들어서 믿고 싶었다. -단편 601,60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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