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줄거리와 리뷰
중세시대의 역사와 종교, 사랑,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사상이 잘 드러난 소설이라 단순한 추리 소설로 분류하기엔 좀 모자란 부분이 있다.
장미의 이름은 박식한 윌리엄 수도사와 아직은 세상에 어두운 젊은 수도사 아드소가 베네딕트회의 한 수도원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수도원에서 아델모라는 수도사가 죽은 채로 발견되는데 수도원장은 심문관이었던 윌리엄 수도사에게 범인을 밝혀줄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수도회에서는 아델모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살인이 일어나고 두 수도사는 이들의 죽음이 장서관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책에는 소형제회, 프란체스코 수도회, 베네딕트회, 도미니크 수도회 같은 여러 종파와 탁발승, 엄격주의파 같이 평소엔 듣기 어려운 이름들도 나오는데 각 종파가 어떻고 무슨 일을 했는지 쓰자면 너무 길고 복잡하며 사실 외우지도 못했다.
결론은 황제, 종교 지도자라는 교황, 수도원장을 비롯한 각 종파 권력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종파 세력이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다툼을 벌이고 뒤로 술수를 썼으며 이단 심판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윌리엄과 아드소 수도사는 조사를 거듭할수록 비밀스럽고 추잡한 일들이 수도원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은 아델모와 베렝가리오, 베난티오 수도사는 쉽게 말하자면 서로 자는 사이다.
그들이 자는 이유는 단순히 욕망을 채우기 위함은 아니었다. 장서관에 감춰진 책으로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싶은 욕망도 함께였다.
처음에는 범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궁금했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런 궁금증보다는 배경이 된 중세 시대의 모습이나 작가의 사상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범인에 대한 놀라움은 크지 않게 되었다.
윌리엄은 책이 보관된 (아프리카의 끝이라고 불리는) 비밀의 장소를 밝혀내고 그곳에서 호르헤와 웃음, 희극에 대한 마지막 논쟁을 벌인다. 조사를 거듭할수록 비밀도 밝혀지지만 윌리엄도 수도사도 성장해 나간다.
범인의 정체는?
범인은 눈먼 노 수도사 호르헤였다. 금단의 책인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 된 비밀의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었다. 이 책에는 웃음에 대한 내용이 쓰여 있는데 내용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수도사가 책이 세상에 알려지는 걸 막기 위해 책에 독을 발라 지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도사들을 죽게 만든 것이다.
상반되는 호르헤와 아드소의 주장
호르헤의 생각은 이렇다. 아리스토텔리스의 책들은 하나같이 기독교가 수세기에 걸쳐 축척했던 지식을 갉아먹었다는 것.
요약하자면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고 두려움 없이는 신앙도 있을 수 없으며 악마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필요하지 않으니 책의 내용을 세상에 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편 윌리엄은 희극이 엄숙함이나 진지함으로 포장된 허위를 다시 한번 검증하게 하고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고 반박한다. 이 것은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모든 걸 들킨 호르헤는 책을 없애기 위해 뜯어먹어 버린다. 그리고 지적 욕구에 목말라하던 윌리엄 수도사는 그 노인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먹어 치우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소리친다.
완벽해 보였던 윌리엄 수도사의 저런 모습이라니 웃기면서도 씁쓸해지는 장면이다.
그는 쓰러진 등잔으로 활활 타버리는 장서관을 보며 눈물까지 흘린다. 여기는 정말 하이라이트고 두꺼운 책 두 권을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어쩌면 윌리엄은 수도사로서는 피해야 하는 욕망을 자기도 모르게 지식의 축적으로 해소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속의 아드소가 조사 중 우연히 만난 마을 여자와 동침한 후 사랑이라는 환상에 열병을 앓고 수도원 내 몇몇 수도사들이 가난한 마을 여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대가로 성을 사는 걸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전한 믿음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내리는 벌이었을까? 불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훌륭했던 장서관을 시작으로 사흘 밤낮 수도원 전체를 홀라당 다 태워버린다. 아쉬우면서도 속이 시원한 느낌.
철학의 증오로 일그러진 호르헤의 얼굴에서 가짜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말이 생각난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도 생겨나며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하지만 엇나간 사랑에서도 올 수 있다는 말. 윌리엄 수도사의 말이다.
진리를 받아들임에 대한 허용 범위라고 해야 할까?
이것이 철학자였던 움베르토 에코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주된 내용일 것이다.
너무 어렵다. 진리와 철학이 떼 놓을 수 없는 관계로 보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진리를 엿가락처럼 꼬아 의심하게 만드는 것도 철학적 사고가 아닌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지식을 축적하고 신을 받아들여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죽음 다음에나 해소될 수 있는 것일까?
어렸을 때 EBS에서 본 숀 코넬리 주연의 동명 영화가 생각난다. 영화가 어땠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숀 코넬리는 윌리엄 수도사와 너무 잘 어울렸다. 정말 오래된 기억이지만 책을 읽으면서도 숀 코넬리의 얼굴이 떠오를 정도로 말이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보고싶다. 검색해 보니 숀 코넬리는 2020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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